맨위로가기

쉴리 프뤼돔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쉴리 프뤼돔은 프랑스의 시인으로, 1839년 파리에서 태어나 1907년 사망했다. 그는 기술자가 되려다 눈병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법학을 공부했으며, 1865년 첫 시집 《구절과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1901년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감상적인 스타일이었으나 점차 철학적, 과학적 주제를 다루는 개인적인 스타일로 변화했다. 그는 또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었으며, 드레퓌스 사건에서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옹호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프랑스의 수필가 - 마르셀 프루스트
    마르셀 프루스트는 20세기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친 프랑스 소설가이자 비평가이며,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기억, 시간, 자의식을 다루는 독특한 장편소설로 평가받는다.
  • 프랑스의 수필가 - 볼테르
    볼테르는 이성, 자유, 관용을 옹호하며 종교적 불관용과 전제 정치를 비판하고 프랑스 사회 개혁을 촉구한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작가, 역사가이다.
  • 1839년 출생 - 나가쿠라 신파치
    나가쿠라 신파치는 마쓰마에 번 출신으로 신센구미 2번대 조장으로서 뛰어난 검술 실력과 이케다야 사건에서의 활약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곤도 이사미의 독단적인 행동에 반발하여 신센구미를 탈퇴한 후 보신 전쟁에 참여하고 검술 사범 및 저술가로 활동하며 신센구미 재평가에 기여, 대중문화 콘텐츠에서도 재해석되는 인물이다.
  • 1839년 출생 - 존 D. 록펠러
    존 D.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미국의 기업가이자 자선가로, 그의 사업 방식은 독점적이라는 비판과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았으며, 후에 막대한 재산을 자선 사업에 기부하여 록펠러 재단을 설립하는 등 다양한 논란과 업적을 남겼다.
  • 1907년 사망 - 최익현
    최익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고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며 의병을 일으켰으며,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외세 침략에 저항하다 대마도에서 순국하고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 1907년 사망 - 이준 (1859년)
    이준은 대한제국의 법조인, 외교관, 독립운동가로서, 독립협회 활동, 민족 계몽 운동, 헤이그 특사 활동을 펼쳤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하여 일제의 침략을 알리고 독립 의지를 고취했으며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쉴리 프뤼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프뤼돔
1880년대의 프뤼돔
본명르네 프랑수아 아르망 프뤼돔
출생일1839년 3월 16일
출생지파리, 프랑스
사망일1907년 9월 6일
사망지샤트네말라브리, 프랑스
직업작가
국적프랑스인
언어프랑스어
장르
수필
사조파르나스주의
수상노벨 문학상 (1901년)
묘소페르 라셰즈 묘지
작품
데뷔작《시와 시편》 (Stances et Poèmes) (1865년)
대표작《시와 시편》 (Stances et Poèmes) (1865년)에 수록된 《부서진 꽃병》 (Le Vase Brisé)
영향
영향 받은 인물알퐁스 드 라마르틴
블레즈 파스칼
임마누엘 칸트
영향을 준 인물해당 사항 없음
가족
친척앙리 제르보 (조카)
훈장
수상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1895년)

2. 생애

1839년 3월 16일 프랑스 파리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기술자가 되기 위해 과학 기술 전문 학교에 입학했지만 눈병을 앓아 중퇴했다. 그 후 공장 직원으로 근무하였으며 1860년 법대에 입학했다.[4]

1865년 자신의 첫 시집 《구절과 시 (Stances et Poèmes)》를 발표했고 1881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 1894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옹호했다.[5]

1901년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5] 그는 "고상한 이상주의, 예술적 완결성, 그리고 마음과 지성의 희귀한 조화의 증거를 보여주는 그의 시적 작품에 대한 특별한 인정"을 받아 수상하게 되었다. 수상금 대부분을 문인 협회에서 수여하는 시상금 창설에 사용했다.

1907년 9월 6일 샤트네말라브리에서 사망했으며,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치되었다.[4]

2. 1. 초기 생애

1839년 3월 16일 프랑스 파리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르네 프랑수아 아르망 프뤼돔(René François Armand Prudhomme)이다. 아버지 쉴리 프뤼돔과 어머니 클로틸드 카이유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그가 두 살 때 사망했다.[1][2] 이후 어머니와 함께 삼촌 집으로 이사했다. 그는 아버지의 이름 "쉴리"를 자신의 성에 붙여 쉴리 프뤼돔으로 불리게 되었다.

보나파르트 고등학교에서 고전 문학과 수학에 관심을 보이며 공부했다.[1][2] 기술자가 되기 위해 과학 기술 전문 학교에 입학했지만, 안질(눈병)을 앓아 중퇴했다.[4] 르 크뢰조 지역의 슈나이더 철강 주조 공장에서 잠시 근무한 후, 공증인 사무실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2. 2. 문학 활동

학생 단체인 '라 브뤼예르 학회'에서 그의 초기 시들이 호평을 받으며 문학 경력을 시작했다.[1] 1865년, 첫 시집 《구절과 시 (Stances et Poèmes)》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4] 이 시집에는 그의 가장 유명한 시인 ''Le vase brisé''가 포함되어 있었다. 1866년에는 《시험 (Les Épreuves)》, 1869년에는 《고독 (Les Solitudes)》을 발표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발발 전(1870-1871)에 더 많은 시를 출판했다.[1]

이후 출판된 시집은 다음과 같다.

  • 1872년, 《운명 (Les Destins)》
  • 1874년, 《프랑스 (La France)》
  • 1875년,《헛된 상냥함 (Les Vaines tendresses)》
  • 1876년, 《꼭대기 (Le Zénith)》 (《두 세계 평론》 지에 실림)
  • 1878년, 《정의 (La Justice)》
  • 1886년, 《프리즘, 다양한 시 (Le Prisme, poésies diverses)》
  • 1888년, 《행복 (Le Bonheur)》


그의 철학은 ''La Justice'' (1878)와 ''Le Bonheur'' (1888)에서 표현되었는데, 이러한 시에서 사용된 극단적인 수단 절약은 일반적으로 철학 작품으로서의 주장을 발전시키지 않고 시적 품질을 저해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1]

1881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 1895년, 레지옹 도뇌르 훈작을 받았다.[1]

''Le Bonheur'' 이후, 프뤼돔은 시에서 벗어나 미학과 철학에 관한 에세이를 썼다. 그는 ''L'Expression dans les beaux-arts'' (1884), ''Réflexions sur l'art des vers'' (1892), 블레즈 파스칼에 관한 일련의 기사(두 세계 평론, 1890), 자유 의지에 관한 논문(''La Psychologie du Libre-Arbitre'', 1906,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에 실림)을 출판했다.[1]

2. 3. 철학 및 기타 활동

프뤼돔은 초기 작품들의 감성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파르나스파(고답파)의 형식성과 철학적, 과학적 주제에 대한 관심을 통합한 개인적인 스타일로 점차 전환했다. 그는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영감을 받아 이 책의 첫 번째 권을 운문으로 번역했다. 1884년, 《미술에서의 표현 (L'Expression dans les beaux-arts)》을 발표했고, 1892년에는 《시의 예술에 대한 고찰 (Réflexions sur l'art des vers)》을 발표했다.[4] 1890년대 후반에는 생리학자 샤를 로베르 리셰와 교류하며, 잡지 《과학 잡지 (프랑스)》에 글을 기고했다.

1894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옹호했다.[5] 1901년에는 《시적 유언 (Testament poétique)》을 발표했고, 1905년에는 블레즈 파스칼에 관한 철학서 《파스칼에 따른 참된 종교 (La Vraie Religion selon Pascal)》를 저술했다. 1906년에는 《자유 의지에 대한 심리학 (La Psychologie du Libre-Arbitre)》을 발표했다.

2. 4. 노벨 문학상 수상

1901년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5] 그는 "고상한 이상주의, 예술적 완결성, 그리고 마음과 지성의 희귀한 조화의 증거를 보여주는 그의 시적 작품에 대한 특별한 인정"을 받아 수상하게 되었다.[5] 상금의 대부분을 문인 협회에서 수여하는 시상금 창설에 사용했다. 1902년 호세마리아 드 에레디아, 레옹 디에르크스와 함께 프랑스 시인 협회를 창립했다.

2. 5. 죽음

1870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샤트네말라브리에서 거의 은둔자처럼 생활해야 했고, 마비 발작을 겪었다. 1907년 9월 6일 샤트네말라브리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으며,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치되었다.[4] 장례식에는 프랑수아 코페, 쥘 르메트르, 프레데리크 마송 등이 참석했다. 유산은 조카이자 화가, 일러스트레이터인 앙리 제르보가 상속받았다.

3. 작품

쉴리 프뤼돔의 작풍은 초기에는 고답파에 속하여 형식 탐구와 결합된 개성적인 스타일에 관심을 가졌지만, 점차 철학에 몰두하면서 작품에 도덕적인 성찰이 나타나게 되었다. 일상의 애정을 노래한 대표작 『깨진 화병』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은 크게 시와 산문으로 나눌 수 있다. 시는 초기 감상적인 스타일에서 파르나스파의 영향으로 형식미와 철학적 주제를 다루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대표적인 시집으로는 구절과 시, 시험, 고독, 운명 등이 있다. 산문은 미학과 철학에 관한 에세이가 주를 이루며, 《미술에서의 표현》, 《시의 예술에 대한 고찰》 등을 발표했다.

3. 1. 시

쉴리 프뤼돔의 시는 초기에는 감상적인 스타일이었으나, 점차 파르나스파의 형식성과 철학적, 과학적 주제에 대한 관심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영감을 받아 이 책의 첫 번째 권을 운문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의 철학은 ''La Justice'' (1878)와 ''Le Bonheur'' (1888)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주요 시집은 다음과 같다.

출판 연도제목비고
1865년구절과 시(Stances et Poèmes)생트뵈브의 찬사를 받음. 대표작 Le vase brisé (깨진 꽃병) 수록.
1866년시험(Les Épreuves)
1869년고독(Les Solitudes)
1872년운명(Les Destins)
1872년전쟁의 인상(Impressions de la guerre)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다룸.
1874년프랑스(La France)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다룸.
1875년헛된 상냥함(Les Vaines tendresses)
1876년꼭대기(Le Zénith)양세계 평론 지에 실림.
1878년정의(La Justice)
1886년프리즘, 다양한 시(Le Prisme, poésies diverses)
1888년행복(Le Bonheur)
1865년-1888년(Poésie)
1908년유고집(Épaves)사후 출판


3. 2. 산문

''Le Bonheur'' 이후, 프뤼돔은 시에서 벗어나 미학과 철학에 관한 에세이를 썼다. 그는 ''L'Expression dans les beaux-arts'' (1884)와 ''Réflexions sur l'art des vers'' (1892)의 두 가지 중요한 에세이를 출판했다.[1]

  • 1883년–1908년, 《쉴리 프뤼돔 작품집 (Œuvres de Sully Prudhomme)》 (시와 산문), 8권
  • 1884년, 《미술에서의 표현 (L'Expression dans les beaux-arts)》
  • 1892년, 《시의 예술에 대한 고찰 (Réflexions sur l'art des vers)》
  • 1896년, 《나는 무엇을 아는가? (Que sais-je?)》 (철학)
  • 1901년, 《시적 유언 (Testament poétique)》 (에세이)
  • 1905년, 《파스칼에 따른 참된 종교 (La vraie religion selon Pascal)》 (에세이)
  • 1922년, 《일기: 편지-사상 (Journal intime: lettres-pensée)》


그는 또한 블레즈 파스칼에 관한 일련의 기사(1890)를 두 세계 평론에 기고했다.[1]

다음은 프뤼돔이 작성한 산문의 목록이다.

발표일제목비고
1889년 4월 20일에펠탑La Revue scientifique』
1890년 5월 31일"자연"의 자필 원고La Nature』
1893년지구 생명의 기원에 관하여
1899년 1월 28일과학적 정신과 최종 원인론『과학 잡지』
1899년 3월 4일인격화와 최종 원인론『과학 잡지』
1899년 4월 15일다윈주의와 최종 원인론『과학 잡지』, 샤를 로베르 리셰에게 보내는 답신
1899년 5월 20일실험적 방법과 최종 원인론『과학 잡지』, 리셰에게 보내는 답신
1899년 8월 12일최종론적 원칙과 과학 적용에 대한 비판『과학 잡지』
1899년 12월 9일실증 과학 앞에서의 자유 의지『과학 잡지』
1902년최종 원인론
1905년파스칼의 진정한 신앙 (La Vraie Religion selon Pascal)[http://gallica.bnf.fr/ark:/12148/bpt6k215328n.pdf 갈리카]에서 열람 가능
1922년일기: 편지-사상사후 출판


4. 후대의 영향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저서 《화상의 추억》에는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쉴리 프뤼돔의 시를 읽고 있다고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6] 크리스틴 루위키의 저서 《언제나의 "불평"이 사라지는 책》에서는 쉴리 프뤼돔의 시 '습관'이 소개되어 있다.[7]

이탈리아의 작곡가 가에타노 브라가벨기에 출신의 작곡가 세자르 프랑크는 쉴리 프뤼돔의 영향을 받아 '깨진 꽃병'이라는 곡을 발표했다. 벨기에의 작곡가 앙리 뒤파르크는 쉴리 프뤼돔의 시 '한숨(Soupir프랑스어)'과 '갤럽(Le galop프랑스어)'에 곡을 붙인 가곡을 모두 1869년에 발표했다.

1949년에 일본인으로 처음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는 자서전 《나그네, 한 물리학자의 회상》을 집필하던 중 쉴리 프뤼돔의 '깨진 꽃병'을 소개하며 "글을 쓰면서 문득 이 시를 떠올렸다."라고 설명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8]

참조

[1] 웹사이트 Sully Prudhomme – Biographical https://www.nobelpri[...] Nobel Foundation 2016-07-13
[2] 웹사이트 https://www.authorsc[...] 2024-06-30
[3] 문서 スタンスと詩』という表記揺れも存在するが、本項目では『詩賦集』として統一する
[4] 웹사이트 シュリ・プリュドムとは https://kotobank.jp/[...] 2016-11-07
[5] 서적 ノーベル文学賞 : 作家とその時代 丸善 1992
[6] 웹사이트 https://books.google[...]
[7] 웹사이트 https://books.google[...]
[8] 서적 旅人 ある物理学者の回想 角川文庫 199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